찬바람 몹시 불던 날
금속 노동자이던 때, 한번은 일이 있어 사무실에 불려간 적이 있었다. 일하던 복장 그대로여서 작업복이니 장갑이 시커먼 상태였고 볼 수는 없으나 얼굴도 그랬을 것이다. 끼고 있던 장갑을 무심코 바로 옆에 있는 책상에 벗어 올려놨다. 그 책상의 주인인 여직원이 그걸 책상가로 옮겨 놓는데 그 행동거지가 좀 못마땅했다. 그냥 손으로 들어 치우는 것도 아니고 무슨 징그러운 벌레 집듯이 손가락 끝으로 살짝 들어 옮기는 모양새가 보기에 좋지 않았다. 하긴 시커먼 먼지를 뒤집어 쓴 장갑이 내 책상에 올려져있고 그걸 옆으로 밀어놓긴 해야겠는데 지저분한 그것에 선뜻 손이 가지지는 않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장갑의 주인인 나는 그것이 못내 서운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같이 동행한 현장 송주임이 역시 그걸 본 모양이었다. 이 사람이 또 워낙 괴팍하고 깐깐한 성질머리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대뜸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드러워? 야이 시발년아! 우리가 현장에서 그렇게 먼지 마셔 가면서 시커멓게 뒤집어쓰고 일하니까 느네들이 이쁜옷 입고 편하게 앉아서 일하는 거야!”
사무실은 일순간 얼어붙었고 정적이 있었다. 졸지에 봉변을 당한 여직원은 울음이 터져 뛰어나갔고 나 역시 당황해 몸 둘 바를 몰라 했던 기억이 있다.
일찍 찾아온 추위.
하얗게 서리가 내리더니 하루 종일 미친바람이 불면서 몹시도 추웠다. ADSL을 광케이블로 교체하느라 KT기사가 방문했다. 혹한이 아니니 두꺼운 겨울옷을 입을 정도는 아니어서 맨드리가 좀 부실했는데 추워 입술은 새파랗고 오돌돌 떨고 있었다. 그 상태로 전봇대에 올라가 작업을 하는데 괜스레 짠하다.
남들이 생각하기에 KT에 다닌다고 하면 좋은 직장이라고 선망하기도 할 것이다. 그치만 KT에도 여러 부서의 여러 직종이 있으니 우리가 선망하고 부러워하는 직종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기실 가장 필요하고 핵심적인 일을 하는 사람은 바로 그들 현장의 기사들이다. 우리가 필요한 통신과 인터넷을 직접 보내주는 일은 그들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깨끗한 부서의 사람들은 말하자면 서포터인 셈이다. 아주 심하게 말하면 굳이 없어도 지장 없는 사람들이다.
KT 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고상해 보이는 회사들도 다 그렇다. 얼마 전 여의도 KBS에 놀러간 적이 있다. 수많은 직원들이 있지만 방송국의 핵심적인 일은 하는 것은 역시 방송을 송출하고 관리하는 엔지니어와 기사들이다. 그들이 있어 우리가 안방에 앉아서 방송을 보고 듣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는 편안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이 받고 있다. 우리가 선망하는 그 직업군이다. 방송에 굳이 필요치 않아 보이는 연예인들에게 한번 출연에 몇 백 몇 천을 준다고 하니 내용을 잘 모르는 나는 많이 심기가 불편하다.
그러고 보면 삼성 반도체가 세계굴지의 기업이지만 그것을 직접 만드는 생산현장의 사람들은 그 회사에서 가장 낮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사회라는 것의 속성과 특징을 잘 모르지만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는 것만은 늘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