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이화가 유혹해서

설리숲 2017. 4. 12. 01:00

 

 

 봄의 색은 핑크다.

<고향의 봄> 노랫말에는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라 하여 죄다 분홍색이다.

 작가는 아마 화려하고 현란한 분홍을 봄의 이미지로 보았나 보다.

 내 어릴 적 산내들에 온갖 꽃이 만개할 때면 근동 처자들이 너도나도 집 밖으로 나다녔는데 아련한 기억으로 아마 분홍색 옷을 많이 입었던 것 같다.

 

 내 안의 봄은 분홍이 아니다.

 나의 봄은 이화, 즉 배꽃(梨花)이다. 이화는 흰색이지만 색은 별 의미가 없다. 단지 배꽃이라는 것만이 의미를 가진다. 붉은 진달래 흐드러진 꽃무리도 막막하게끔 가슴 설레지만, 봄의 절정에 하얗게 흐드러진 배나무 밑을 거닐어 보자.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사람 환장할 지경이다.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이놈의 이화는 무가내하 사람을 유혹해 불러낸다. 달빛, 하얀 배꽃, 훈풍,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청춘의 정념.

 나는 늘 그런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곤 한다. 숨이 멎을 것 같은 향기에 취해 사모하던 어여쁜 소녀가 있어 살그머니 내 손을 잡아 이끈다. 그 하얀 손에 이끌려 밤새도록 이화 그늘숲을 거닌다. 소녀의 단내 나는 입에서 속살거리는 밀어들.

 

 

 

 

 

 

 

 

 그게 환상이고 잔인하게 환상에서 깨 나더라도 여전히 봄밤은 내게 환상 그 이상의 것이다. 단 하얀 배꽃 흐드러진 그 그늘 아래서라면 말이다.

 

 지금 이화가 흐드러졌다. 과수원에 가서 향기에도 아찔 취해 보고 사진도 찍어 본다. 요즘 과수원은 죄다 키 작은 나무들이다. 오로지 수확을 위해서 강제로 나무를 못 크게 한다. 가지에 무거운 것을 매달아 옆으로 휘게 만들어 놓았다. 위로 뻗는 가지는 가차없이 잘라 버린다. 그래서 과수원의 나무들은 사람보다 키가 작다. 온전한 나무라 할 수 없다. 사람을 위해서 본 정체성을 무참히 짓밟히고 도저히 나무라 할 수 없는 해괴망측한 모습을 하고 서서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화는 나를 유혹한다. 이 봄엔 그네들과 희희낙락 청춘을 즐겨 보나.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은 삼경인데

   일지춘심을 두견이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들어 하노라

 

 

 

 

 

쇼팽 발라드 1번